“승차감”은 자동차의 성능을 평가하는 좋은 기준입니다. 엔진 소리가 들리지 않고 도로의 상황에 상관없이 탑승객에게 편안함을 제공해 주는 차를 승차감이 좋은 차라고 이야기합니다. 얼마전 한 인터넷의 자동차 커뮤니티에서 “하차감” 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고가 차량에서 내릴 때 주변 사람 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데서 오는 만족감을 뜻하는 용어로, 과시를 위해 국산차가 아닌 외제차를 선호하는 이들 사이에서 널리 쓰였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자동차의 경우 “하차감”이 매우 좋은 차들로 이 차에서 하차할 때 주변 사람들이 그가 내리는 자동차로 인해 그 사람을 성공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 혹은 많은 부를 축적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승차감도 중요하지만 하차감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기 때문에 고급 승용차를 선호하는 경향이 생겨난 사회 현상에 의해 비롯된 단어입니다. 요즘에는 이 “하차감”이라는 단어가 적용되는 범위가 넓어져서 비록 승용차에만 국한되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하철 역에서 내리는지” “어느 동네에 사는지”등에도 사용된다고 하네요.
최근 한국의 어느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진정한 하차감은 자동차가 아 니라 지하철역에서 나온다”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글쓴 이는 “요즘 누가 독일 3사 자동차에서 내리는 걸 쳐다보고 있느냐” 며 “반면 지하철역 도곡역에서 내리려 하면 ‘저 사람 여기 사는 건가?’하고 힐끔 힐끔 쳐다 본다.”고 합니다. 이어 “잠실역이나 강남역은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환승역이라서 하차감이 없다.”고 덧붙였다고 하네요. 하차하는 역이 도곡역이냐, 청담역이냐, 잠실역이냐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고 다르게 보는 물질 만능주의가 가져온 하나의 병폐적인 사회 현상인 것 같습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이 “하차감”이라는 말은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비록 비싼 고급 승용차를 타며 살고 있진 않지만, 여전히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삶의 고된 현실 속에서 살아가지만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세상의 가치관을 뛰어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살아 간다면, 그런 사람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어떠할까요? 그런 사람이 느끼는 인생의 “하차감”은 어떠할까요? 자신이 주목받는 삶은 아닐지라도 나로 인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주목을 받으시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느끼는 하차감은 그 누구도 느낄 수 없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스런 하차감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합니다. 사람들의 소리에 너무 귀를 기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고유의 가치과 존귀함을 놓쳐 버리고 세상의 평가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는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남이 보는 나”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에 맞는 “나만의 하차감”을 누리고자 그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되었습니다.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 삼으신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세상에 선포하고 드러내는 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인생의 하차감”을 누릴 수 있으면 어떨까요? 내가 손에 잡고 누리고 살아가는 이 땅의 것들이 아닌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의 모습이 나의 삶을 통해, 우리 교회를 통해 세상 사람에게 보여 질 수 있다면… 나의 삶의 한 절이라도 주님을 닮아가는 삶으로 “인생의 하차감”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을 삼고 살아갈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