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차감”있는 삶을 살아 봅시다!
“승차감”은 자동차의 성능을 평가하는 좋은 기준입니다. 엔진 소리가 들리지 않고 도로의 상황에 상관없이 탑승객에게 편안함을 제공해 주는 차를 승차감이 좋은 차라고 이야기합니다. 얼마전 한 인터넷의 자동차 커뮤니티에서 “하차감” 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고가 차량에서 내릴 때 주변 사람 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데서 오는 만족감을 뜻하는 용어로, 과시를 위해 국산차가 아닌 외제차를 선호하는 이들 사이에서 널리 쓰였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자동차의 경우 “하차감”이 매우 좋은 차들로 이 차에서 하차할 때 주변 사람들이 그가 내리는 자동차로 인해 그 사람을 성공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 혹은 많은 부를 축적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승차감도 중요하지만 하차감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기 때문에 고급 승용차를 선호하는 경향이 생겨난 사회 현상에 의해 비롯된 단어입니다. 요즘에는 이 “하차감”이라는 단어가 적용되는 범위가 넓어져서 비록 승용차에만 국한되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하철 역에서 내리는지” “어느 동네에 사는지”등에도 사용된다고 하네요. 최근 한국의 어느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진정한 하차감은 자동차가 아 니라 지하철역에서 나온다”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글쓴 이는 “요즘 누가 독일 3사 자동차에서 내리는 걸 쳐다보고 있느냐” 며 “반면 지하철역 도곡역에서 내리려 하면 ‘저 사람 여기 사는 건가?’하고 힐끔 힐끔 쳐다 본다.”고 합니다. 이어 “잠실역이나 강남역은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환승역이라서 하차감이 없다.”고 덧붙였다고 하네요. 하차하는 역이 도곡역이냐, 청담역이냐, 잠실역이냐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고 다르게 보는 물질 만능주의가 가져온 하나의 병폐적인 사회 현상인 것 같습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이 “하차감”이라는 말은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비록 비싼 고급 승용차를 타며 살고 있진 않지만, 여전히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삶의 고된 현실 속에서 살아가지만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세상의 가치관을 뛰어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살아 간다면, 그런 사람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어떠할까요? 그런 사람이 느끼는 인생의 “하차감”은 어떠할까요? 자신이 주목받는 삶은 아닐지라도 나로 인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주목을 받으시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느끼는 하차감은 그 누구도 느낄 수 없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스런 하차감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합니다. 사람들의 소리에 너무 귀를 기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고유의 가치과 존귀함을 놓쳐 버리고 세상의 평가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는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남이 보는 나”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에 맞는 “나만의 하차감”을 누리고자 그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되었습니다.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 삼으신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세상에 선포하고 드러내는 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인생의 하차감”을 누릴 수 있으면 어떨까요? 내가 손에 잡고 누리고 살아가는 이 땅의 것들이 아닌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의 모습이 나의 삶을 통해, 우리 교회를 통해 세상 사람에게 보여 질 수 있다면... 나의 삶의 한 절이라도 주님을 닮아가는 삶으로 “인생의 하차감”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을 삼고 살아갈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2024-09-23
POWER DISTANCE를 아시나요?
어제 금요성령집회에서 말씀을 전해 주신 목사님은 공군 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전역 하신 이후에 민간 항공기 기장으로 오랜 기간 일을 하시고 은퇴하셔서 목회를 하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조종사로서의 경험에 비추어 항공기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Power Distance (권력 거리)”라고 말씀하시며 가정이든, 회사든, 교회이든 세상의 모든 조직에는 “Power Distance”가 있는데 이 “Power Distance”의 거리가 좁혀져야지만 강하고 안전한 조직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셨었습니다. Power Distance라는 개념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은 “호프스테더(Hofstede)”라는 사회학자입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간의 간격, 즉 거리감을 뜻하는 단어로, 국가와 문화마다 정도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상사와 부하, 어른과 아이, 부모와 자식 간에 Power Distance가 심한 문화가 있고 상대적으로 작은 문화도 있는데, 한국은 그 간격이 큰 나라에 속한다고 합니다. 이 Power Distance의 간격이 멀면 비행기를 운항하는 조종사와 부조종사 사이에 소통이 단절되어 대형 사고로 이어지기 까지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함께 비행을 하는 교회에서도 교회의 리더십 사이에, 혹은 교인들 사이에 Power Distance가 멀어지면 교회에 많은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인류 역사상 이 Power Distance의 간격을 없애기 위한 가장 큰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입니 다. 창조주인 하나님과 타락한 피조물인 인간과의 Power Distance는 도저히 가까와질 수 없는 무한대의 거리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함 가운데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 니다. 그런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과 같이 낮아지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Power Distance를 0 (ZERO)으로 만드셨습니 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이름을 힘입어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영광된 신분을 얻게 되었 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우리 가정 가운데 이 Power Distance의 거리가 좁혀지길 원합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배워 교회의 리더십들이 작은 자, 상처받은 자, 약한 자들을 찾아 먼저 손내밀어 줄 수 있는 교회. 목소리 큰 사람, 힘이 쎄고 잘난 사람이 중심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교회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너가 되고, 너가 내가 되어 우리 주님과 함께 하는 즐거움이 가득한 교회, 서로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교회, 우리 교회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 함께 기도 ON! 합시다. 할렐루야! (2023년 10월 29일, 주일)
2024-06-12
고백은 Go Back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았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우리의 마음에 도장처럼 새겨져서 그 고백과 함께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첫사랑의 고백은 물론이고 부모님께서 자녀들에게 들려 주었던 “얘야, 엄마가, 아빠가 너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단다”라던 사랑의 고백 등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만나 고 헤어졌던 많은 순간에 들어왔던 고백이 있습니다. 반대로 마음 속에 담아 둔 표현되지 못한 고백도 있을 것입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생전에 들려 드리고 싶었지만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에 갇아 둔 불효자의 고백, 아내에게, 남편에게 쑥스러워 여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마음 속 고백들이 있을 것입니다. 친구 간에, 교회 교우들 사이에서 말하고 싶었지만, 표현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 못한 많은 사연들이 있습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말해야 하는데 네 앞에 서면 아무 말 못하는 내가 미워져”라며 고백하지 못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내가 미워지는 경험을 하며 “눈치만 살피다가 지나는 한 평생”이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기억에 남는 고백이 있습니다. 이민 오기 위해 인천 공항에서 한국을 떠나던 날, 가족들과 많은 교회 선/후배들이 배웅하기 위해 모인 그 곳에서 지금은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교회 후배가 제 손을 꼭 잡고는 “형,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형 덕분이에요. 고마워요.”라며 눈물을 글썽이던 그 고백을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불신 가정에서 처음 예수님을 믿었던 서로의 모습이 닮아서 친형제처럼의지하고 함께 기도했었 던 그 후배가 자기에게 믿음의 도전을 주고 함께 삶을 나누어 준 저에게 고맙다던 그 고백과 함께 그 후배가 지금도 그립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고백하는 데 선수이십니다. 성경 전체를 읽어 보면 온통 피조물인 우리에 대한 사랑의 고백뿐입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고백하시다가 급기야는 그 아들을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기까지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렇게 그 사랑을 고백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성탄의 계절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고백으로 우리 가슴이 다시금 콩닥콩닥 뛰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담아두고 고백하지 못했던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이 계절이 되면 어떨까요? 가족들에게, 교회의 교우들에게,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가두어 두었던 마음의 고백을 해보시면 어떨런지요? 특별히 지난 주에 나누어 드린 성탄 카드를 통해 교회 교우들에게 마음을 나누어 보세요. 사랑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멀어졌던 관계가 가까워 지게 되길 기도합니다. 성탄의 계절이 그저 즐겁고 신나는 Happy Holiday가 아닌 주님으로 인한 기쁨과 평강이 가정과 우리 교회와 온 땅에 가득한 Merry Christmas가 되길 기도합니.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고백함으로 그 사랑이 풍성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2023년 12월 17일
2024-06-12
영적 알고리즘 (Algorithm)
요즘 유튜브를 하는 분들이 주변에 많이 생겨나고 유튜브 영상을 통해 정보를 얻는 추세가 대두되면서 “알고리즘”이라는 단어를 종종 듣곤 합니다. “알고리즘”은 원래 컴퓨터 프로그 램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보통 반복되는 문제를 풀기 위한 절차, 혹은 그 자체를 의미한다 고 생각하면 됩니다. 최근 유튜브 AI가 나에게 가장 적합한 영상을 추천해 주는 것을 유튜 브 알고리즘이라고 부르는데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내가 주로 시청하는 영상을 분석하여 나의 성향에 맞는 영상을 지속 추천해 줌으로써 조회수를 늘리고 광고 수입을 증대하고 자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유튜브 계정에 게시되는 영상을 보면 그 사람의 관심 사나 추구하는 정보가 어떤 것인지, 유튜브를 통해 어떤 영상을 주로 시청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평소에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주로 보는 사람에게는 뉴스 영상이, 설교나 찬양 영상을 주로 보는 사람의 계정에는 설교와 찬양 영상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드라마 영상이 추천 영상으로 원치 않아도 게시가 됩니다. 얼마 전에 에밀리 오 집사님이 운영하는 유투브 채널의 영상을 몇 편 보았더니 그 다음부터 유투브가 제가 원치도 않았는데 친절하게도 에밀리 오 집사님의 다른 영상을 계속올려 주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 유투브 알고리즘에 대해 생각하다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어쩌면 이 알고리즘이 작용 하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 하루 중에 내가 가장 많이 묵상하고 있는 어떤 현상과 사건에 따라 우리의 삶이 이끌려 가게 됩니다. 우리 마음 에 미움을 묵상하고 품고 있다면 우리 마음에 미움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봅니다.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품고 있다면 우리 마음 속에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지속 자라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죄를 마음에 품고 죄된 생각을 가지면 우리 마음의 알고리즘이 작동하여 우리가 원치는 않지만 죄에 대한 소욕이 자라나게 되고 죄의 열매 를 거두게 되며, 성령의 소욕을 따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면 성령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지금 나는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나요? 영적 알고리즘이 내 마음에 추천해 주는 생각은 어떤 것들인가요? 이웃과 교회를 살리고 나와 가정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게 되길 기도합니다. 기도 ON!합시다.
2024-06-04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으세요.
함께 교회를 섬기던 분의 오해로 인한 다툼으로 교회를 떠날 것을 고민하던 사람의 이야기 를 오래 전에 들었었습니다. 교회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던 분이 자신에 대하여 없는 이야기 를 지어서 자신을 험담하고 급기야는 싸움까지 하며 자신을 어렵게 만들곤 했다고 합니다. 어린 사람이고 미성숙하기에 그러려니하고 참고 넘어가다가도 간혹 억울하고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고 올라와 따끔하게 혼을 내주고 교회를 떠나야 겠다 마음을 먹고 있던 차에 그 상대방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를 일으키고 먼저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관계에 깊은 상처를 입은 그는 아내에게 그 일을 이야기하며 교회를 떠나는 것이 마음 편하게 신앙생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것 같다며 자신의 생각을 아내에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의 아내는 매우 지혜롭고 사려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아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 기도하고 결정해도 늦지 않으니 기도해 보자고 하더랍니다. 그 역시도 아내의 말이 현명한 방법인 듯하여 같이 기도하며 기다렸다고 합니다. 며칠 후, 그 아내가 자신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교회를 떠나 지 않고 계속 남아있는 것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일인 것 같다”며 “그 사람들을 위해 서도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 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셔서 다른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며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게 해 달라고 기 도하자”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행여 그 분들이 먼 길 돌아 헤매다가 다시 돌아갈 곳이 없을 때 우리 교회를 바라보고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우리 때문에라도 다시 돌아 올 수 있지 않겠냐. 돌아와 그 고된 인생을 기댈 비빌 언덕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뜻밖의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고된 인생길에서 지쳐 쓰러져 소망을 잃어 버렸을 때 갈보리 십자가 주님을 바라 보면 주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향해 두 팔 활짝 펴시고 우리를 안아 주시듯이, 우리도 그렇게 하자. 기도 해 보니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었어요.” 아내의 깊은 마음에서 고백하는 그 말에 감동하여 그 교회에 계속 남아 있게 되었고 그 이후에 아내 의 이야기처럼 그 사람과의 오해가 풀리고 관계가 회복되어 이제는 가장 친한 믿음의 동역자가 되었노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안아 주시고자 두 팔을 활짝 펴고 있는 주님의 사랑의 품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어떤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이라도 우리가 그 품으로 나아가면 언제든 그 자리에서 두 팔 활 짝 펴시고 우리를 안아 주십니다. “세상을 사는 지혜”라는 찬양의 가사처럼 “오늘도 여전히 주님은 그 자리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돌보시는데... 언제나 사랑의 주님은 그 자리에서 끝까지 놓지않고 붙드시는데...” 늘 같은 자리에서 우리를 돌보이고 붙드시는 주님으로 인해 내 영혼은 늘 평안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갈 바로 그 곳입니다. 2023년 11월 19일 주일
2024-06-04
당신의 기도가 나를 살렸어요!
얼마 전에 아는 지인과 함께 커피 타임을 가지면서 그 분의 살아 온 삶의 여정에 대해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25여년 전에 이민을 오신 분으로 이민 오기 전 한국에서는 전문직에 종사하며 실력을 인정받고 삶의 특별한 어려움 없이 살아 오다가 캐나다 이민을 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의 지위와 명성을 모두 내려 놓고 낯선 환경과 새로운 분위기에서 시작하는 이민의 삶은 녹록치 않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가족들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과 힘든 과정이 없이 순조롭게 정착을 하며 생활을 하던 중 사업이 어려워지고 동시에 사기를 당하며 모든 책임을 홀로 감당해야할 상황이 되어 하루 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고 삶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는 어려움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거래처의 밀린 대금과 미납된 세금을 회수하려는 독촉 전화와 은행 계좌의 동결, 렌트비 연체로 인한 건물 주인의 압박,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가족과의 관계에 문제 발생 등 사방을 둘러 보아도 꽉 막힌 시간을 몇 달간 보내며 차라리 파산 (Bankruptcy)을 신청하고 멀리 떠날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그냥 삶을 마감할까? 이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고 저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상황을 벗어나려 숨을 크게 쉴 여유도 갖지 못한 채 하루 하루를 보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상황을 돕지 못하는 하나님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밤마다 울며 불며 하나님 앞에 나가 눈물로 기도하는 아내의 기도 소리가 듣기 싫어 골방에 들어가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마음으로 울며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친구들과 가족들의 도움으로 힘든 시기를 어렵사리 넘겼다고 하면서 그 분이 이렇게 고백하는 말을 들었습 니다. “그 때 아내의 기도가 나를 살렸습니다.” 죽을 것만 같았던 그 순간에,  같이 방법을 찾고 지혜를 모아야 할 그 순간에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않고 그저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던 그 아내의 기도가 삶의 소망을 끊어 버리려고 했던 자기를 살렸다며 눈물을 슬쩍 훔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분과 헤어지고 나서 계속해서 마음에 남아 메아리치는 말 한 마디. “당신의 기도가 나를 살렸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당신이 있고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내가 있어서 나의 기도가 너를 살리고 너의 기도가 나를 살리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너와 내가 기도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우리의 기도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의 어려움들을 이겨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분은 아직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불안정한 상태이지만 마음의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의 상황은 변하지 않을지라도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바뀌어 믿음으로 상황을 해석해 낼 줄 아는 능력, 그리고 그 안에서 평강을 누리게 하시는 은혜, 하나님의 때에 모든 상황이 역전될 것을 믿는 믿음을 일상의 삶 가운데서 누리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신이 날까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는 사람은 삼류이고 참고 견디는 사람은 이류이고 그 어려운 상황 중에도 그 상황을 즐기며 웃는 사람이 일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일류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 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서 나를 살리는 당신의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간증을 나누게 될 날을 기대 합니다. “당신의 기도가 나를 살렸습니다.! 우리 모두 기도 ON! 합시다! (2023년 11월 5일, 주일)
2024-05-29
교회는 항상 내 편이다.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내 편이 되어 준다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시간들이 얼마나 즐거울까 를 생각해 보곤 합니다. 저의 청년 시절에 출석했던 교회는 고려대학교 앞에 있는 장로교회 였습니다. 어느 해 청년부 담당 목사님이 교체되면서 청년부 내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청년부를 지탱하고 이끌어가던 프로그램은 성경 공부였습 니다. 로마서는 기본이고 4복음서와 바울 서신 등 거의 신학 생 수준의 성경공부 모임이 여러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목사님이 오시면서 찬양과 성령 안에서의 참된 교제, 전도와 선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시도되었지요. 당시 한국 교회 청년부에서는 GBS라고 하여 Group Bible Study가 유행하던 시절이었기에 소그룹 성경 공부는 기본적으 로 운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청년부가 부흥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주변에 대학교들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었음에도  30-40여명 정도가 모였었는데 100명에서 150명, 다시 200여명까지 1년여만에 놀라울 정도의 성장을 보였습니다. 예배 시간 외에도 함께 만나 밥먹고 커피마시며 밤이 새도록 수다 떠는 교제가 활발해졌습니다. 말씀으로 권면하고 도전하며 힘을 얻는 것도 중요했지만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모임에 활력을 갖게 한 것은 바로 교제였습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삶을 이해하고 생각을 나누며 함께 기도하며 위로하고 위로받는 참된 교제가 없었다면 그런 부흥은 일어 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각박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교회가 우리들의 편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직장 상사가 유별나게 괴롭히며 힘들게 할 때 청년부 모임에 가면 “야! 그 부장님 왜 그런데... 이해가 안되네. 힘내.”라며 내 편이 되어 주었습니다. 학교에서 친구와의 관계로 힘들어 할 때, “우리가 있잖니, 걱정하지마. 우리가 친구가 되어 줄께.” 라며 함께 손내밀어 잡아주고 편이 되어 주었던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있었던 그 청년부의 모습을 저는 지금도 그리워 하곤 합니다. 빠듯한 집안 형편으로 학교 등록금 걱정을 하며 힘들어 하는 친구를 위해 같은 마음으 로 여름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여 번 돈을 친구에게 내어 주며 편이 되어 주었던 귀한 믿음의 지체들이 있었기에 만사 제쳐두고 청년부 모임에 참석하곤 했었습니다. 거기에 가면 나의 일과 문제들을 자신의 일로 여기며 걱정해 주고 기도해 주는 “내 편”들이 가득 했었습니다. 그 곳에 있는 모든 청년들은 “내 편”이었습니다. 이론적인 지식을 앞세우 는 곳이 아닌, 순수하게 서로의 “편”이 되어 사랑의 위로와 참된 교제가 있던 곳. 그 곳에 놀던 때가 그립곤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의모습은 어떤가요? 나는 누군가의 “편”이 되고 있는지요? 교회 안에 “ 내 편”은 있는지요? 외롭고 힘들 때, 세상에 나의 찐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 없다 고 느껴질 때 “내 편”이 되어 나와 함께 걱정하고 기도해 줄 사람이 가득 한 교회라면 분명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일 것입니다. 서로의 “편”이 되어 주는 교회는 분명히 주님과도 “한 편”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언제나 “내 편”입니다.라는 고백이 있게 되길 기도합니다. [2023년 10월 15일, 주일]
2024-05-28
Fix & Fix!!
예전에 불렀던 찬양 중에 “눈을 주님께 돌려(Turn Your Eyes Upon Jesus)”라는 찬양곡이 있습니다. 그 가사는 1절이 “네 마음에 근심 있느냐. 어둔 길로 행하느냐. 우리 주 예수 바라봄으로 밝은 빛 찾아오리.” 2절은 “저 죽음을 이기신 예수, 우리들도 따릅니다. 죄의 권세를 물리치려고 주님을 따릅니다” 이고 3절의 가사는 “주 말씀은 변치 않도다. 그 언약을 의심하랴.  세상 끝 날이 이를지라도 그 구원은 성취되리.” 입 니다. 그리고 후렴이 “눈을 주님께 돌려 그 놀라운 얼굴 보라.  주님 은혜 영광의 빛 앞에 세상 근심은 사라지 네.”입니다. 신실하신 주님께 우리의 눈을 고정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면 우리의 세상 근심은 사라진다는 믿음의 고백이 담긴 찬양입니 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과 상황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중심을 지키며 정직하게 살아가기에 그렇게 만만 치 않습니다. 가정 안에서의 부부간 의 문제, 자녀로 인한 걱정과 근심, 재정적인 어려움, 관계로 인한 부담감, 미래에 대 한 불안감과 답답함 등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상황을 묵상 해 보면 한순간이라도 마음이 평안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 주 금요성령집회를 위해 기도하는 중에 제 마음에 한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FIX”라는 단어입니다. 삶이 복잡하고 고단함의 연속이지만 삶의 문제들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믿음의 눈을 고정 (FIX)하면 주님이 찾아 오셔서 우리의 환경을 고치시든, 우리 자신을 고치시든 우리를 새롭게 고치신다 (FIX)는 것입니다. Fix your eyes on Jesus, Jesus will fix what the world breaks in you. 이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이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토미테니 목사님이 쓴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이고 도전이 되었던 이야기는 바로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이야기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모리아 산을 오르는 아브라함. 자식을 칼로 찢어 번제로 드려야 하는 그 길을 아브라함은 새벽부터 오르 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고 피해갈 수 없는 삶의 큰 고난의 산 앞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 분을 높여 드리고자 하는 열망으로 모리아 산을 그 아들과 함께 올라 갑니다. 이 책에서 저자인 토미테니 목사님 은 이삭을 대신 해서 드려진 양의 출처에 대해서 깜짝 놀랄만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답을 내려 줍니 다. 하나님이 모리아 산 반대편에 있는 양에게 명령하셨고, 그 양은 아브라함과 같은 속도로 모리아 산 정상을 향해 올라온 것이라고... 척박한 모리아 산, 그 정상을 중심 으로 왼쪽 편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산을 오르고, 오른쪽 편 반대쪽 산등성이에 서는 양이 올라가는 장면을 하늘 높이 우리의 관점을 변화시켜 바라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양편에서 올라가던 아브라함과 양은 하나님에 의해 “예정된 교차점”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 자리는 모리아 산 정상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예배와 기도의 자리이고 헌신의 장소이지 않을까요? 예배와 은혜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자신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여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게 되면 이해할 수도 없는 힘겨운 그 고난의 길, 모리아 산을 향해 올라가던 아브라함의 걸음 걸음들을 통하여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과 사람들과의 문제들 틈 속에 끼여 숨이 막혀 오지만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 높이 날아 올라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되어 우리 삶을 치유하시는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 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의 시선이 주님께로 모아지고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변화되어 우리 인생의 반대편 산등성이에서 우리를 위해 양을 몰고 오시는 주님을 보게 되길 기도합니다. Fix and Fix!!
2024-05-28
엄마 기도? 아빠 기도?
요즈음에 대두되고 있는 단어 중에 “진정성 (Integrity)”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과 마음 과 언행, 그리고 그 삶의 태도와 방식이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한 때 취업을 할려면 스펙이 좋아야 한다고  하여 스펙 쌓기에 열중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첫인상이 중요하기에 외모를 다듬는 것에 우선 순위를 두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에는 사람의 성품, 즉 진정성에 무게를 두고 사람을 평가한다고 합니 다.  그래서 기업 교육 프로그램을 보면 진정성과 관련된 주제들이 많아졌습니다. ”리더의 진정성”, “진정성 있는 회사 경영이란?”, “영업 사 원의 진정성”등... 이 “진정성”이란 말을 기독교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아마도 “주께 하듯” 하는 마음과 행함일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하고 누구를 만나든 주님을 대하듯이 최선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상대방을 존중하는 삶의 자세를 “진정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로 이 “진정성”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흘리시던 예수님의 눈물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성을 봅니다. 수가성 여인을 대하시는 주님의 속 깊은 마음 속에서 진정성을 느낍니다. 하늘 영광 다버리시고 죄인들을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성육신의 주님에게 서 진정성의 참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이 진정성은 영혼을 회복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진정성이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은 더욱 부요해 질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 진정성이 회복된다면 우리 기도가 많은 역사를 이루어 낼 것입니다. 이 진정성이 우리 안에서  회복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며칠 전에 식사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 다. 원래는 식사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이와 같은 거북(?)한 대화는 결코 하지 않는데 그 날은 무슨 이유인지 실수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 같습 니다. “아빠는 엄마의 기도를 들으면 마음이 위로가 되고 힘이 난단다. 엄마의 기도는 유창하지 않은데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힘이 느 껴져.  그런데 아빠의 기도는 유창하고 힘이 있고 멋진데 별로야... 너희도 그런것 같지 않니?” 두 아들이 오랜만에 합심하여 그렇다고 하네요. ㅠㅠ  “왜 그런 것 같아?” 둘 중 한 아들 녀석이 뼈때리는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엄마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아빠는 입으로만 기도하니 그렇지 않을까요?!” 정답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아들 녀석이 괘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찔렸습니다. 진정성은 하나님과 통하는 마음인가봐요. 진정성은 서로의 마음을 이어 주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삶의 무게에 짖눌려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어 힘들어 하는 이웃 에게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가가 손 내밀어 주는 우리 교회가 된다면 그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큰 감사의 계절을 선물하게 될 거에 요. 진정성있는 따스한 말 한마디, 작은 손짓 하나로 우리의 이웃이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의 이웃이 참소망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맛보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감사의 계절에 우리 이웃에게 감사를 선물하는 진정성이 나와 우리 교회 안에  회복되길 기도합니다.  [2023년 10월 8일]
2024-05-21
POWER DISTANCE를 아시나요?
어제 금요성령집회에서 말씀을 전해 주신 목사님은 공군 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전역 하신 이후에 민간 항공기 기장으로 오랜 기간 일을 하시고 은퇴하셔서 목회를 하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조종사로서의 경험에 비추어 항공기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Power Distance (권력 거리)”라고 말씀하시며 가정이든, 회사든, 교회이든 세상의 모든 조직에는 “Power Distance”가 있는데 이 “Power Distance”의 거리가 좁혀져야지만 강하고 안전한 조직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셨었습니다. Power Distance라는 개념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은 “호프스테더(Hofstede)”라는 사회학자입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간의 간격, 즉 거리감을 뜻하는 단어로, 국가와 문화마다 정도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상사와 부하, 어른과 아이, 부모와 자식 간에 Power Distance가 심한 문화가 있고 상대적으로 작은 문화도 있는데, 한국은 그 간격이 큰 나라에 속한다고 합니다. 이 Power Distance의 간격이 멀면 비행기를 운항하는 조종사와 부조종사 사이에 소통이 단절되어 대형 사고로 이어지기 까지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함께 비행을 하는 교회에서도 교회의 리더십 사이에, 혹은 교인들 사이에 Power Distance가 멀어지면 교회에 많은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인류 역사상 이 Power Distance의 간격을 없애기 위한 가장 큰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입니 다. 창조주인 하나님과 타락한 피조물인 인간과의 Power Distance는 도저히 가까와질 수 없는 무한대의 거리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함 가운데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 니다. 그런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과 같이 낮아지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Power Distance를 0 (ZERO)으로 만드셨습니 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이름을 힘입어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영광된 신분을 얻게 되었 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우리 가정 가운데 이 Power Distance의 거리가 좁혀지길 원합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배워 교회의 리더십들이 작은 자, 상처받은 자, 약한 자들을 찾아 먼저 손내밀어 줄 수 있는 교회. 목소리 큰 사람, 힘이 쎄고 잘난 사람이 중심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교회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너가 되고, 너가 내가 되어 우리 주님과 함께 하는 즐거움이 가득한 교회, 서로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교회, 우리 교회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 함께 기도 ON! 합시다. 할렐루야! (2023년 10월 29일, 주일)
20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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